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마카스 마사히코 (문단 편집) === 말년과 죽음 === 1943년 3월 만주작곡가협회가 구성되자 작곡가협회 고문을 맡았으며 1944년 10월, 만주예문연맹이 개편되어 만주예문협회로 재조직되자 회장에 취임하여 예문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예문에는 본질적으로 국경, 민족을 초월한 성격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해도 그 때문이야말로 모든 예문이 사상전의 무기로써 중요시되는 것이고 민족협화의 정신도 예문에 의해서야말로 배양되는 것입니다. 이 예문의 성질은 자칫하면, 비국가적, 비국민적인 것과 혼동을 야기하기 쉬운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앞서 말한 대로 예문정신을 존중하고 비평정신의 양양을 기대한다고 해도, 국가의 융창 없이 예문의 융창이 없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문은 모두 애국의 예문이어야 하는, 이것은 엄숙한 사실입니다." 이렇듯 아마카사는 예문을 사상전 무기이며 민족협화의 수단으로 보았다. 그는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만주국 예문가들의 활동 지침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벌어지면서 소련군이 몰려오자 8월 20일 아침, 이사장실 칠판에 "큰 도박, 원금도 이자도 없이 빈털터리"라고 적은 후 청산가리를 먹고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신은 만영본사 뒤편 호서회관으로 소방용 수레에 실려 운구되었는데 3천명의 조문객이 1킬로미터에 걸쳐 따라갔으며 오족협화의 정신을 위해 수레의 오른쪽을 일본인이, 왼쪽을 중국인이 잡고 끌었다. 그의 장례식이 거행된 직후, 대동대가의 관동군 총사령부를 소련군의 카바료프 대장이 접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